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종교 개혁 (문단 편집) === [[스위스]]의 개혁가들 === 루터가 열심히 활동하던 무렵, 스위스는 당대 최고의 병사들인 [[스위스 용병]]들의 나라였다.[* 다만 절정기는 이미 지나간 때였다. 이 무렵부터 총기가 본격적으로 전쟁에 등장하여 전쟁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중이었기 때문. 실제로 이들은 당시 시점에서 얼마 못 가 몰락하고 최강의 병사라는 타이틀은 [[스페인]]의 [[테르시오]]가 이어받게 된다.] 이들은 여러 곳에서 용병으로 근무하면서 수입을 냈고, 이는 스위스 지역의 경제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한편, 당시의 스위스는 아직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한 채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사이의 주도권 다툼에 계속 희생되고 있었고, 스위스의 자주적인 독립을 원하는 목소리는 갈수록 커져만 갔다.[* 결국 스위스는 종교개혁의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는 [[30년 전쟁]]이 끝난 뒤 독립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시대에 [[취리히]]에는 [[울리히 츠빙글리]]라는 또 다른 개혁가가 있었다. 사순절에 소시지를 먹은 사람에 대한 처벌과 관련된 논란인 소시지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그도 동시대의 루터처럼 면벌부와 가톨릭의 부패를 비판하였으며, 성경에 종교의 근본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단, 루터와 그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는 실제로 그가 머물던 [[취리히]]를 본인의 손으로 개혁시키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취리히는 그의 손에 의해 성공적으로 탈바꿈하였다. 이후, 츠빙글리는 이러한 개혁을 스위스의 다른 곳에도 전파시키려 노력했으나, 가톨릭 도시들, 그리고 신학적인 해석에 차이를 보이던 루터회를 믿는 도시들과 반목하게 된다. 이러한 대립은 결국 내전으로 확산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스위스에서의 영향력을 잃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카를 5세]]는 스위스의 가톨릭파를 도와 진압군을 보내고, 이 과정에서 츠빙글리는 전사한다. 자세한 전개 과정은 [[울리히 츠빙글리]] 항목을 참조할 것. 그리고 이러한 내전은 [[스위스 용병]]이 몰락하는 데에 일조하게 된다. 한편, [[제네바]]에는 종교적 탄압을 피해 프랑스에서 망명 온 루터와 츠빙글리보다 한 세대 아래의 법학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종교개혁의 2번째 불씨를 당긴 '''[[장 칼뱅]]'''이었다. 그의 사상[* 자세한 내용은 [[장 칼뱅]]을 참조할 것.]은 신학 외적인 부분에서는 철저히 보수적이던 루터회보다도 진보적이었고, 그 덕에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들이 주로 채택한 루터교회[* 이는 신학적으로 가톨릭에서 벗어나 황제의 권위와 멀어지는 대신, 민중 반란과 같은 사회적 문제에서는 보수적이여야 하는 그들의 입장과 루터교회가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와 달리 일반 민중들이나 상공업자들에게 그 사상이 널리 퍼져나갔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루터보다 능력 있는 개혁가여서 츠빙글리처럼 제네바를 자신의 손으로 탈바꿈시켰으며[* 다만 극도로 금욕적인 칼뱅의 교리 때문에 이는 반발도 심했으며, 실제로 칼뱅은 이 과정에서 제네바에서 잠시 추방당하기도 했다.] 법학과 고전 문학을 전공한 그의 경력을 바탕으로 '기독교 강요'라는 자신의 사상을 정리한 책을 펴냈고, 대중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도 능력이 있었다. 이외에도 스위스 제네바에는 [[기욤 파렐]], [[마리 당티에르]] 등 다수의 종교개혁가들이 몰려 들었는데, 이러한 이유로 칼뱅의 교리는 안 퍼지려야 안 퍼질 수가 없었고, 1530년대에 이르면 칼뱅의 교리를 신봉하는 세력도 상당히 커지게 되어 단순한 탄압만으로는 이들을 누를 수 없게 되었다. 본래 제네바를 통제하던 [[사보이아 공국]]이 [[이탈리아 전쟁]] 중 프랑스 침공을 받아 사실상 붕괴되어 제네바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면서 칼뱅교회는 급속도로 세력을 늘려나갔고 루터회와는 달리 독일을 넘어서 프랑스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까지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위그노]]와 잉글랜드 [[청교도]]의 출발점이 바로 칼뱅이며, 1534년에는 잉글랜드의 [[헨리 8세]]가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치하에서 독립시켜 [[영국 국교회]]로 국가교회화했고[* 이는 [[북유럽]]의 루터파 지역도 마찬가지이다. [[덴마크]], [[스웨덴]]에서 국가교회화하자 지배하에 있던 [[핀란드]],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 등도 루터파를 받아들인 국가교회로 전환한다.][* 물론 현대 성공회 자체는 [[프로테스탄트]] 계열로 분류된다. 그러나 [[헨리 8세]] 시기에는 개신교 성향이 오히려 탄압받았고 본격적으로 개신교화된 건 [[에드워드 6세]]와 [[엘리자베스 1세]] 시기 칼뱅주의를 받아들이고 나서이다. 그리고 개혁교회이면서 동시에 보편교회를 지향하는 모호한 정체성 때문에 18세기까지도 혼란이 제법 있었다.] 그리고 결국 칼뱅파는 1550년대 무렵에 스위스 전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